여태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어본 적이 없습니다.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산 책일지라도 괜히 흰 눈밭에 발자국을 내는 것 같아서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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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지만 집 앞 도서관엔 줄 그어진 책이 많습니다.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눈밭이 즐비하다는 말입니다. 대체로 책들은 조금씩 구겨지거나, 손 모양에 알맞게 휘어져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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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렇기에 서점의 신간 코너와는 달리 제 아무리 빽빽하게 꽂혀있다 하여도 손쉽게 꺼낼 수 있습니다. 그럼 나도 따라 자세를 느슨하게 하고는 겁내지 않고 책을 펼칠 수 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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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껏 부드러워진 종이의 결을 훑듯 주욱 책을 넘기다 보면 가장 많이 펼쳐 본 곳에 자연스레 멈추게 되는데, 나는 책의 첫 장을 읽기도 전에 이곳을 먼저 들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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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기엔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밑줄이 쳐진 문장이 있습니다. 그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해보고, 다시 첫 장부터 읽어나가는 겁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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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리고 다시 이 문장에 도착할 때쯤이면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이들과 닮은 마음이라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. 그럼 나는 그 책을 더 좋아하게 되고, 그 끝까지 기쁘게 산책을 할 수 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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여태 나를 훑어보아준 사람이 한두 명 있었습니다. 하지만 끝까지 읽어주거나, 옅은 밑줄조차 그어주지 않더군요.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. 새 책을 대하는 기분을 이해하니까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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당신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. 그래도- 우리는 서로를 읽어나가야 합니다. 젊은 마음, 빳빳한 종이들. 베일 것 같은 가장자리를 두려워말고 쓰다듬어 줍시다.
가장 아끼는 펜을 들어 어느 부분이 어여쁜지 밑줄 그어 알려줍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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서로의 사랑을 빌리고, 오래도록 돌려주지 맙시다.